Andy Goldsworthy, Snow Shadow, Brough, Cambria, 13th Jan. 1985

from http://www.goldsworthy.cc.gla.ac.uk/image/?id=ag_03164&t=1


다시 앤디 골즈워디. 

빗 속에 누웠던 Rain Shadow 이후 반 년 뒤, 

이번에는 눈이 내리는 캄브리아의 숲 속에 누웠다. 

작가의 기록에 따르면 매우 추웠고, 

이미 쌓인 눈은 치워내 넓은 공터를 만들었다.  

두번째 시도만에 이 ‘그림자’를 남기는 데 성공했다. 


Rain Shadow처럼 눈이 녹으면, 

혹은 오히려 더 내린다면

그림자 역시 가뭇없이 사라질테고, 

일회적이고 소유 불가능하며, 

따로 이 사진과 같이 기록을 남기지 않는다면

개념concept으로만 존재할 예술. 


이 작품의 진짜 주제는 그림자가 아닌

 근본적으로 ‘눕는다’는 행위 그 자체이며, 

그림자란 그 행위가 남긴 

아주 한시적인 자취에 불과하다. 

대저 ‘환경미술 environmental art’은

많은 경우 ‘행위예술 performance art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것은 퍼포먼스 아트는 늘 

사진이나 비디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행위의 순간이 지나고 누군가 기억하지 않는다면

그 예술의 행위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사라지기 마련이어서, 

그리고 사실은 

그렇게 사라지는 게 마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 그 일이 있었다”는 증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 행위가 

예술로서 존재할 수 없는, 

또는 기억될 수 없는 아이러니. 

순간을 지향하지만

영원히 기억받고 싶은 욕망. 


Snow Shadow를 예술품으로 관리해야 한다면 

그 물리적 형태는 코닥크롬64로 찍은 

35밀리 슬라이드 필름이다. 

크기는 필름의 사이즈인 36cm x 24cm


어쩌면 실인즉슨, 

사진이라는 예술 자체가 

행위예술과 종이 한 장 차이인지도 모른다. 

사진이라는 틀에 담기는 대상은 

다큐멘터리건 인물이건, 풍경이건 막론하고

언제나 순간적이며, 찰나의 사건들이다. 

사진으로 남지 않는다면 사라질 

모종의 사실들, 혹은 진실들. 


사진은 언제나, 

“그때-그것이-존재했음”의 증거다. 

마치 여기에서 보이는,

비어있으나 그가 존재했음을 알리는

앤디 골즈워디의 ‘그림자’, 

그 ‘사진-기록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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