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hn Divola, As Far As I Could Get, 1996-7

from: http://saint-lucy.com/conversations/john-divola/


예술적 아이디어란 

때로는 얼마나 단순한가. 

삼각대를 펼치고 카메라를 설치한 뒤

셀프 타이머를 누른다. 

그리고 뛰어간다,

갈 수 있는 한 만큼,  

카메라 앞에 놓인 풍경 속으로. 


당신은 당신의 뒷모습이 

어떻게 찍힐 것인지 알 수 없다. 

아주 우연한 순간에, 

셀프 타이머가 작동을 끝내는

10초 뒤 어느 순간에, 

당신의 모습은 당신이 의도하지 않은 채로 

프레임 안에 갇힐 것이다.

그러나 당신의 모습이 어떨 것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뛰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기록하고 싶었다는 것. 


근대 이후 예술이란 

그 예술이 다루는 매체medium의  

한계를 경험하는 것이다. 

때로 뛰어넘을 수도 있고, 

그 경계면에서 아슬아슬 줄타기 할 수도 있다. 


그는 사진이 피사체의 특정한 순간, 

이른바 ‘결정적 순간decisive moment’을 

다루는 방식을 파괴한다. 

사진가의 의도에 따라 순간을 

고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는 그저 뛸 뿐,

사진이 찍히는 바로 그 순간은 

철저하게 우연에 맡겨진다.

예술가의 의도는 최초의 아이디어, 

‘셀프 타이머가 작동하는 동안 뛰어간다’는 

그 행위performance 자체에 있다[각주:1]


그가 뛰는 것은 

그냥 뛰는 것이 아니다. 

그는 사진(기)의 한계를 향해 뛰어간다. 

10초라는 셀프 타이머 작동의 한계, 

어떤 카메라도 셔터막이 열리는 순간에는

렌즈를 통해 피사체를 볼 수 없다는 사실[각주:2]

프레임 저 멀리 놓여진, 

10초 안에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소실점, 

이 모든 예술적 의도에도 불구하고

글로 씌어진 설명이 없다면 

사실상 설명되지 못하는, 

사진이 극복할 수 없는 그 

본원적인 한계를 향해. 

 



  1. Andy Goldsworthy의 작품에 대한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사진은 근본적으로 행위예술performance art와 매우 긴밀한 관계를 가진다. [본문으로]
  2. 그런 점에서 사실 모든 사진은 우연의 요소를 포함한다. (뷰파인더가 따로 존재하는 레인지 파인더 카메라나 트윈 리플렉스 렌즈 카메라는 셔터가 열리는 순간에도 피사체를 볼 수 있으나, 뷰파인더 자체가 렌즈를 통해 보는 像이 아닌 것은 마찬가지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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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y Goldsworthy, Snow Shadow, Brough, Cambria, 13th Jan. 1985

from http://www.goldsworthy.cc.gla.ac.uk/image/?id=ag_03164&t=1


다시 앤디 골즈워디. 

빗 속에 누웠던 Rain Shadow 이후 반 년 뒤, 

이번에는 눈이 내리는 캄브리아의 숲 속에 누웠다. 

작가의 기록에 따르면 매우 추웠고, 

이미 쌓인 눈은 치워내 넓은 공터를 만들었다.  

두번째 시도만에 이 ‘그림자’를 남기는 데 성공했다. 


Rain Shadow처럼 눈이 녹으면, 

혹은 오히려 더 내린다면

그림자 역시 가뭇없이 사라질테고, 

일회적이고 소유 불가능하며, 

따로 이 사진과 같이 기록을 남기지 않는다면

개념concept으로만 존재할 예술. 


이 작품의 진짜 주제는 그림자가 아닌

 근본적으로 ‘눕는다’는 행위 그 자체이며, 

그림자란 그 행위가 남긴 

아주 한시적인 자취에 불과하다. 

대저 ‘환경미술 environmental art’은

많은 경우 ‘행위예술 performance art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것은 퍼포먼스 아트는 늘 

사진이나 비디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행위의 순간이 지나고 누군가 기억하지 않는다면

그 예술의 행위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사라지기 마련이어서, 

그리고 사실은 

그렇게 사라지는 게 마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 그 일이 있었다”는 증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 행위가 

예술로서 존재할 수 없는, 

또는 기억될 수 없는 아이러니. 

순간을 지향하지만

영원히 기억받고 싶은 욕망. 


Snow Shadow를 예술품으로 관리해야 한다면 

그 물리적 형태는 코닥크롬64로 찍은 

35밀리 슬라이드 필름이다. 

크기는 필름의 사이즈인 36cm x 24cm


어쩌면 실인즉슨, 

사진이라는 예술 자체가 

행위예술과 종이 한 장 차이인지도 모른다. 

사진이라는 틀에 담기는 대상은 

다큐멘터리건 인물이건, 풍경이건 막론하고

언제나 순간적이며, 찰나의 사건들이다. 

사진으로 남지 않는다면 사라질 

모종의 사실들, 혹은 진실들. 


사진은 언제나, 

“그때-그것이-존재했음”의 증거다. 

마치 여기에서 보이는,

비어있으나 그가 존재했음을 알리는

앤디 골즈워디의 ‘그림자’, 

그 ‘사진-기록물’처럼. 


Andy Goldsworthy, Rain Shadow, St.Abbs, Scotland, June 1984

from http://www.goldsworthy.cc.gla.ac.uk/image/?id=ag_02944&t=1


비가 내렸다. 

그는 누워있었다, 비가 그칠 때까지. 

그리고 일어나 사진을 찍는다. 

그의 ‘그림자’, 그의 실존의 ‘흔적’, 

‘그가 거기에 있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흔히 귀신이나 유령 따위의 초자연적 존재는

그림자도, 거울 속의 반영도 있을 수 없다. 

그림자와 반영은 오롯이 ‘지금-여기’의 

실존적 존재 만의 것이다. 


그러나 그 실존의 증거로서의 흔적은

그 흔적이 속한 존재와 마찬가지로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삶만큼이나 삶의 흔적들 역시 

덧없는 것, 

아마도 서너 시간 뒤면 빗물이 말라 

앤디 골즈워디가 남긴 이 기묘한 ‘초상화’도

 찾아볼 길이 없어졌으리라. 


남은 것은 아티스트의 기억, 

온몸이 흠뻑 젖었을, 

마음 뿐만 아니라 몸으로 새긴 기억. 

혹은 그가 지도 위에 표시했을 지 모를

이 자리의 대강의 위치, 

그리고 위와 같은 몇 장의,

사진. 


이른바 ‘환경미술’이란 이런 것이다. 

자연 속으로 들어가 남긴 것은 

그 자연과 함께 존재하고 사라진다.[각주:1]

당신은 그것을 소유할 수 없다. 


그것으로 족하다. 

인간이 남기는 흔적이란, 

그렇게 종적없이 사라지는 게 마땅한 것. 

오노 요코의 말을 변용하자면

우리 머리 속에 들어있는 어떤 것도

자연보다 ‘아름다울’ 수는 없다.[각주:2]


아니, 인간은 이미 

너무 많은 흔적을 남겼고, 

대부분은 아름답지 않으며, 

너무 오래 지속될 것이다,

자연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1. 심지어 환경미술의 대표작, 로버트 스미드슨의 거대한 Spiral Jetty조차 본래 강수량에 따라 그레이트 솔트 레이크에 잠겨 보이지 않게끔 의도됐던 것이다. 요즘 들어 기후변화로 부쩍 줄어든 강수량 탓에 거의 늘상 노출돼 있다고는 하나, 이 또한 자연의 변화에 따른 결과일 뿐. [본문으로]
  2. Look at the nature around you. Is the inside of your head prettier than that? – Yoko Ono [본문으로]



참으로 별 볼 일 없는 풍경이다. 

깎아지른 기암절벽도, 광활한 평원도, 

수정처럼 투명한 호수나 드넓은 바다도 없이, 

휘어지고 뒤엉킨 나무와 덩굴들, 흔하게 보는 웅덩이와

심지어 버려진 물병들, 나무궤짝들, 정체불명의 물건들. 


어쩌면 사진 초보가 동네를 돌아다니며 

그냥 마구 찍어댄 사진과 별 다를 바 없어 보이고, 

‘나도 저 정도 쯤은 찍는다’고 싶어질 지도 모를 사진. 


그러나 이 사진이 수록된 

존 고시지(John Gossage)의 사진집 The Pond는 

1985년 발간된 이후 아마도 

가장 ‘아름다운’ 사진집 가운데 하나이자, 

사진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진집 가운데 하나다. 


20세기 말 더이상 순수한 의미의 

wilderness(황무지, 광야)는 존재할 수 없을만큼

빈틈 없이 지구의 구석구석이 개발된 시대에 

과연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Walden Pond)’이 

우리에게 남아있는가, 에 대한 흥미로운 대답이 

바로 메릴랜드주 대형마트 뒤 버려진 

연못 주위 풍경을 찍어낸 

“The Pond”다. 


그러니까 인간의 발길이 닿기 힘든 저 멀리에

인위적으로 보호되고 있는 공원이 아니라  

일상의, 우리가 사는 곳 주변의 잊혀진 풍경이 

진짜 야생(wilderness)인 지도 모른다는 것이며, 

이렇게 불명확하고 모호하며 

중심없는 풍경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어쩌면 현대의 인류에게 허락된 

‘월든’인지도 모른다는 것. 


더욱이 이 사진집은, 

하나하나의 사진이 따로따로가 아니라 

사진집에 편집된 순서 그대로 감상되어야 한다. 

그게 존 고시지의 의도이며, 

그 순서에 따른 내러티브를 읽어내는 것이 

이 사진집의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유일한 방법이다. 


속칭 아주 멋진 “이 한 장의 사진”이 아니라 

‘사진(들)이 과연 어떤 형태로 존재해야 하는가’에 대한 

하나의 답변, 그것도 매우 유려한 답변을 제공하는 사진집. 


책에 담긴 풍경은 

별 볼 일 없기에, 

바로 그렇기에, 


아름답다. 


John Gossage's The Pond from Landscape Stories on Vim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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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편에 살펴보았듯 일반적으로 
폴라로이드 사진은 덜 중요하게 취급되어 온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폴라로이드 사진의 한계와 가능성을 
철저하게 탐구한 사진가들도 적지 않지요. 

또 이른바 일상성과 스냅샷의 가치의 재발견 이후 
폴라로이드 사진 역시 제도예술의 울타리로 흡수되게 됩니다. 
 폴라로이드의 가능성은 정확히 그 한계와 일치합니다. 
단지 그 한계를 한계로 바라보느냐, 
아니면 가능성을 찾아내느냐의 차이겠죠.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폴라로이드의 작은 크기는 

오히려 사진가와 대상, 혹은 사진과 감상자 사이의 거리를 좁혀줍니다. 

만약 친밀성을 강조하는 작품을 추구한다면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겠지요. 


또 정방형이라서 세로사진이나 가로사진을 만들기 힘들지만, 

모든 사진이 동일한 형태를 가지므로 

오히려 시리즈 구성을 할 때 좀 더 일관성을 부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폴라로이드 사진이 정확한 색 재현보다는 

뭔가 좀 부옇고 때로 특정색이 강조되는 경향이 있지만, 

오히려 요즘처럼 레트로한 70, 80년대 컬러가 유행인 시대에는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인기를 끌기도 합니다. 


이제 진짜 폴라로이드는 생산을 중단했지만 

흥미롭게도 스마트폰 카메라 앱인 

인스타그램이나 힙스타매틱이 폴라로이드 사진의 색감을 

어느 정도 흉내내고 있기도 하지요. 


그러니까 문제는 폴라로이드 사진이 

이렇다 저렇다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과연 내가 폴라로이드 사진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내 의도를 잘 반영할 수 있는 도구일까를 고민하는 게 낫겠죠. 


폴라로이드의 크리에티브한 측면을 추구한 사진가들, 

먼저 앙드레 케르테스(Andre Kertesz)의 사진들부터 보지요. 

이 흑백사진을 주로 다뤘던 대 작가가,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조차 어느 인터뷰에서인가 

 사진의 모든 것은 케르테스가 이뤘고 우리는 그저 따라할 뿐, 이라는 

취지로 말한 적도 있었지요.)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 사후 그녀에 대한 그리움과 

고향을 떠나 뉴욕에 사는 향수를 담아낸 폴라로이드 사진들은, 

걸작이라고 칭하기에는 좀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폴라로이드만이 담아낼 수 있는 정서를 훌륭하게 표현해 냈습니다. 

 링크 바로 가기: 앙드레 케르테스 


사진가라기보다 그저 예술가라는 호칭이 더 적합할 

영국의 데이빗 호크니(David Hockney)는 

사진으로 엮는 콜라주로 큐비즘을 재해석했는데요, 

물론 폴라로이드만 사용한 것은 아니지만 주된 도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링크 바로 가기: 데이빗 호크니 (1) 


그는 '보는 방법'과 '매체에 대한 자의식'이라는 면에서 

어쩌면 20세기가 낳은 가장 위대한 예술가 중의 한 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뭐, 제가 가장 좋아하는 예술가여서 하는 말은 아닙니다만.) 

링크 바로 가기: 데이빗 호크니 (2) 


마찬가지로, 포트레이트의 새로운 길을 열어낸 

척 클로스(Chuck Close) 역시 데이빗 호크니와 얼핏 유사하지만 

그만의 독창적인 방법으로 폴라로이드를 사용합니다. 

특히 폴라로이드 사는 종종 작가들을 위해 

특수한 판형의 폴라로이드 필름을 제작하곤 했는데, 

그의 셀프 포트레이트에 이용된 필름은 

20인치 x 24인치의 초대형 포맷이었습니다. 

안셀 아담스도 같은 포맷의 폴라로이드로 촬영한 사진이 존재하죠. 

링크 바로 가기: 척 클로스 


특히 척 클로스의 포트레이트에 있어 

최종 작품의 크기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아마 링크를 들어가시면 대략 첫번째 줄에 

감상자와 작품의 크기를 비교할 수 있는 사진이 있을텐데요, 

실제의 얼굴보다 엄청나게 큰 사진은 이미 이 작품이 

실제의 완벽한 재현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실재(the real)와 그 재현(representation)의 관계, 

혹은 이미지가 실재를 그대로 재현하는 게 

당연하다는 상식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또 어느 정도는 그 관계를 유희적으로 해석하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다룰 이는 매우 독특한 작가입니다. 

그의 작품은 대개 셀프 포트레이트였는데요, 

일단 이미지부터 좀 보고 얘기하는 게 좋겠습니다. 

링크 바로 가기: 루카스 사마라스 


그러니까 이 사진들은 셀프 포트레이트들이지만, 

셀프 포트레이트라는 장르는 단지 해당 예술가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제작되는 것은 아니지요. 

그보다는 한 예술가의 창의성을 보여주려는 의도가 강하기 마련입니다. 

루카스 사마라스(Lucas Samaras) 역시 가끔은 

좀 장난스럽기도 한 사진의 내용과는 별개로, 

폴라로이드의 가능성을 극한까지 추구합니다. 


폴라로이드 사진은 촬영한 뒤 필름이 카메라 밖으로 빠져나오면 

그때부터 현상이 시작되죠. 

대개 1분 30초에서 2분 정도 걸리는 현상시간 동안, 

루카스 사마라스는 폴라로이드의 표면을 때로는 붓으로 문지르고, 

뾰족한 물체로 긁는 등 다양한 변형을 가합니다. 


그러니까 이 자화상-사진들은 

그 자신의 외양(appearance)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가 도구로서 매체(medium)를 다루는 방식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매체를 다루는 방식'과 그에 대한 '자의식(self-conscious)'은 

현대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어찌 보면 이 포스트에 제가 사진을 감상하면서, 

또는 만들어내면서 하는 고민들이 얼추 다 담겨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보는 방법과 매체를 다루는 방법, 그리고 최종적인 작품을 

어떤 식으로 대중에게 보여줄 것인가, 등의 이야기, 

앞으로 중요하게 다룰 수밖에 없을 이야기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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